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을 때 마침내 이 권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나는 권태로 인한 무기력감 때문인지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도 아직 학교에 남아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H였다. 이제 방학이 시작되어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가을학기가 개강할 때나 올라올 것 같다며 가기 전에 잠깐 얼굴이나 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 그 벤치에 앉아있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지어 '그 벤치'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학교 앞 버거킹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잠깐 '그 벤치'를 생각했지만 내 예상이 틀림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윽고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고 나는 발길을 마로니에공원으로 향했다. 무대 앞 돌벤치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H는 그곳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원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H에게 전화가 왔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이며 내가 엉뚱한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전화를 받아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잰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교차로 근처 벤치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주로 들어주는 입장이었지만, 늦은 밤 길가에서 나는 소음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집중해서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누구누구 씨 큰딸이라는 말만 하면 동네에서 다 알 정도로 활발했다는 것과 마당에서 반겨주는 개들이 보고 싶다는 것, 동생이 스무 살이 되면 서울로 와서 같이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중간에 길을 헤맨 것을 들키지 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원남동 사거리 앞에 도착했을 때, H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묻지 않은 채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엔 그런 일이 자주 생겼다. 시간이, 장소가, 때로는 마음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긋나는 일이 잦았다. 내가 느꼈던 무기력감은 권태나 그런 것들이 아닌, 아마 그런 종류의 사소한 어긋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5.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