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을 맞잡고 비비면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 같던 햇살, 그 따사로운 햇살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된 5월과 6월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낮 동안에 발갛게 익은 볼이 채 식기도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우리는 자주 갔었던 동네 놀이터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와 난 마주 보는 방향으로 나란히, 그러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자세로 앉아 그네를 타고 있었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 우리가 태어나기 100년쯤 전에 지구에 살고 있던 사람들 말이야. 지금은 거의 이 세상에 없겠지? 또 100년쯤 시간이 지나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 죽을 테고. 뭔가 어색하지 않아?"

뜬금없는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하는 그녀의 무기다. 나는 허를 찔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게 어때서?"

"생각해봐. 시간이 무한하다고 하지만 우리 인간은 전혀 그렇지 않아. 기껏해야 100년 정도를 이어갈 수 있는 거라구."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는 또 한 번 나를 당황하게 했다.

"덧없는 거야. 시간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어린 왕자가 산과 바다를 기록하던 지리학자에게 왜 꽃은 기록하지 않느냐며 그토록 집요하게 물었던 '덧없다'라는 말. 지리학자가 어떤 대답을 했었나.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갑자기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헤어지게 되면 서로 다른 사람, 만나겠지?"

나는 그네를 멈추고 일어섰지만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음 글쎄. 우린 헤어지지 않았잖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그걸 생각해봐야 아니? 넌 나랑 헤어지고 나면 다른 사람 만날 거잖아. 그 사람과도 헤어지면 또 다른 사람 만나게 될 테고."

"뭐야 재미없어."

나는 당황하지 않았지만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너의 인생에서 나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차지하겠지.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도 얼마간을 차지할 테고. 너에게 있어 나는 덧없는 존재일까?"

불안감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갑자기 지리학자가 어린 왕자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머지않아 사라질 위험이 있다'는 뜻이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책장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어린 왕자에서 지리학자는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래. 그때의 우리는 관계의 덧없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09. 6. 1.

돌이켜보면 "사랑에 빠졌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여행이 으레 그렇듯, 마지막 날은 쉬이 잠들 수가 없게 된다. 남도를 돌아 도착한 곳은 변산반도 채석강 근처 어느 마을의 민박집. 여행이 남긴 것들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밤은 깊어졌고, 마지막 술 한 병마저 비워졌다. 다들 아쉬웠는지 오면서 눈에 담았던 작은 구멍가게를 향해 발을 떼었다. 한참을 가서 보니 이미 문은 닫혀있었고, 다시 한참을 가보니 다행히 큰길가에 아직 열려있는 가게가 있었다.

잠들 수 없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풀썩대던 L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낯선 곳의 낯선 풍광 때문이었을까. 서해안 작은 마을의 고목과 말라붙은 냇가, 곳곳에 붙어있던 핵폐기장 반대 구호문, 닫혀있던 구멍가게를 외로이 지키고 있던 새끼 고양이, 불어오던 바람….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깨어있는(깨어난) 사람들 몇 명과 민박집 뒤편에 놓여있던 평상으로 갔다.

아마 모기가 극성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작은 마을의 표정, 먼 산 너머로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멀리 산과 구름 사이로 밝아오는 새벽을 맞는 순간, 난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낯선 마을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대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사랑에 빠졌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지않고서야 그때의 그 모습, 그 감정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고 아릿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2007. 11. 5.

세 번쯤 진동이 울렸을 때 전화를 받았다. 시끌한 주변 소음과는 대조적인 침착한 목소리로, 침착하지만 술기운이 느껴지는 말투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갑자기,

"좋아한단 말이에요. 내가 좋아한다는 거, 알잖아요.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모르는 척해요. 정말 나쁘다."

라고 말을 끝내더니 또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2010.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