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후일담"이란 단어를 좋아하게 됐다. 국어사전 앱을 켜고 검색해서 나온 결과를 몇 번이고 찾아보고 있다. '(어떤 일이 다 끝난 후에) 그 일 또는 그 일 이후에 벌어진 경과에 대하여 덧붙이는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 특히 저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든다. 보잘것없어 어쩌면, 나밖에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후일담을 쓰고 싶어졌다.

2013. 9. 28. 


그날 평소보다 조금 달뜬 상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낯선 여행지, 밤, 술기운이 적절하게 섞여 서로 추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연애의 조건은 두 가지야.” J는 몇 초 동안 쉼표를 찍는듯하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위로’와 ‘영감’.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영감이 될 수 있는가. 그 두 가지가 연애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러고 나서는 마치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주제를 꺼낸 것처럼,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볼 생각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을 만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2013. 7. 8.

수업이 끝날 무렵 교수님은 시험 일정을 알려주었다. 순간 어수선해진 학생들로 강의실 분위기가 시끄러워졌다. 그러자 교수님은 학생들의 표정을 짐짓 못 본 체하며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 왜 다들 반응이 이렇지? 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학부 다닐 때 교수님이 시험 날짜를 알려주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었어요. 시험은 일종의 축제 아닌가?"


강의실에선 조소, 탄식이 조금씩 섞인 웃음이  나왔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시험이 축제가 될 수 있는 의미를.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에겐 시험도 고백도 하나의 축제와도 같은 의식이 될 것이다.


2013. 3. 24.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을 시간이었는데, 연달아 문자메시지가 다섯 개 울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버렸어. 순서대로 확인해야 했는데 뒤죽박죽 열어버려서, 그리고 메시지 앞뒤가 조금씩 잘려서 도착했기 때문에 말을 맞추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그날 바로 학교 도서관으로 올라가 책을 찾았어. 컴퓨터로 검색을 해서 청구 기호를 되뇌며 서가로 향했는데, 글쎄 강하원과 김채원이 섞여버려 강채원을 찾고 있었단 말이지. 어이없게 두세 번 컴퓨터와 서가를 왕복한 뒤에야 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 벤치는 포기하고 열람실로 내려갔는데 마침 179번이 비어있길래 자리 잡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어. 소설은 왠지 잘 읽히지가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앉아서 읽어내려갔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서 수첩에 옮겨 적었어.


순간의 행복, 그 찰나적인 행복, 어떤 불안의 요소도 있을 수 없는 첫 시작의 느낌.

『겨울의 幻』, 김채원


2008. 5. 6.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요, 사실은 오라버니 때문에 고민 많이 했어요."


꽤 열심히 준비했던 교환학생 발표가 나던 그 날, 계단에서 우연히 만나 생각보다는 들뜨지 않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축하해 주세요."라고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주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던 것이었을까. 앞뒤가 생략된 한마디 말속에는 행간이 담겨있었다.


그 말이 우습게 들려서가 아니라 담담한 그 목소리에 치열했던 시절의 고민이 느껴져, 나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


2014. 5. 1.

"나는 무슨 색을 좋아할거 같아?"

"왜?"

"그냥. 좋아해보려고." 


2014. 5. 26.

어문학 자료실 800번대 서가 왼쪽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H의 긴 머리가 찰랑, 하고 흩날리던 순간 고요하던 도서관에 아찔, 하게 어떤 향기가 코를 찔렀어. '어? 샴푸 어떤 거 써?' 팬틴이라던가 엘라스틴이라던가,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냄새와 이름을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는 조합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지.

기억은 샴푸 냄새나 유행가 멜로디에 얹힌다, 라고 누가 말했었지. (내가 말했어.) 그날의 아찔했던 기억은 팬틴이라던가 엘라스틴이라던가의 향에 아직도 더께처럼 앉아있나 봐.


2012. 5. 10.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새로 산 노트에 무언가를 끼적대다가 고개도 들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영어 학원에서 만난 어떤 남학생이 알파벳 소문자 'r'을 이렇게 쓰더라구요."


노트 구석에 "J"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둥그런 글자를 연습하고는 r이 들어간 단어 몇 개를 적어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나도 이제 이렇게 쓰려구요. 왠지 귀여워 보여."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삶에서 스스로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것 중에, 알파벳 소문자 r의 모양을 다르게 적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에 속할까. 혹은 얼마나 사소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2013. 2. 21.

하릴없이 걷기 시작한 것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마땅히 할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는지 모른다. 한밤의 대학로를 가로질러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자, 북적이던 거리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더니 스산한 기운마저 돌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두지 않는 산책은 일종의 모험이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내가 말했다.) 그렇게 부러 뻔히 아는 곳에서 길을 잃게된 발걸음은 방송통신대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향했다. 마치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어두운 길가에 '교대문구'라는 낡은 간판을 단 오래된 문구점이 있었다.


"왜 문구점 이름이 '교대문구' 일까요?"

"음, 다음 일하는 사람에게 얼른 교대해달라는 뜻으로?"

"아. 그렇구나."


주제가 이어지지 않는 불연속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모험으로 느꼈던 산책이 끝나갈 무렵 우리가 걸어온 길이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담 옆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하, 여기 옛날에 사범대 자리였나보네. 그래서 교대문구인가?"


그날의 불연속적인 대화 탓일까.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불연속적이어서 그때 봤던 연극의 제목도 심지어 계절도 기억나지 않지만, 길을 잃은 곳에서 발견한 교대문구의 간판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2012. 11. 15.

일주일째 지났을 때 결국 CD 플레이어의 배터리가 다 닳았다. 꽉 찬 하루 중 거의 유일한 내 자유시간이라 할 수 있는, 잠들기 직전 몇 분 동안 들었던 게 전부였는데 농활이 끝나기 며칠을 남겨두고 즐거움이 사라져버리게 생겼다.


다음날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배터리를 찾았고 마침 L이 빌려주기로 이야기해주었다. 저녁 시간이 되고 배터리를 받기 위해 여자 방으로 썼던 2층 다락으로 처음 올라갔다. 가방을 뒤적이며 찾고 있는 동안 나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잠들기 직전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트랙을 8번쯤에 맞추어 놓는다."라는 L의 문장이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8번 트랙에 있나, 생각을 해봤지만 그렇다면 8번'쯤'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잠들었을 때 CD가 혼자 돌지 않기 위해 잠드는 시간에 맞춰 나름의 타이머를 켜놓는 방식일 것이라 추측했다.


덕분에 하나의 즐거움을 잃지 않고 남은 며칠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1번 트랙부터 틀었다. 그때 가져갔던 CD 1번 트랙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담았기 때문이었다.

201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