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에서 오랜 시간을 버틴 A는 이제 어둠에 익숙해졌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아주 작은 빛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A는 문득 동굴 속이 너무 익숙해져,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졌다.
2020. 8. 24.
"결말이 새드엔딩이라면 슬픈 영화로 기억되는 거잖아. 수십 개의 장면, 그러니까 재미있거나 아름다웠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슬프게 끝나버렸다고 그냥 그렇게 슬픈 영화가 되는걸까?"
나는 아무 의견이 없어 '그런가….'라며 중얼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이건 슬픈 영화다.'라고 선언하는 건 아닐까?" 되물었다.
2018. 7. 8.
2015. 1. 27.
처음 봤을 때, 당신의 '어떤' 모습에 반해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은 내 안에서 커져만 갔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내가 생각했던 당신의 '어떤'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착각이었을까요. 오히려 다시 만난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싫어졌다거나, 좋아하는 마음이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신을 좋아하는 감정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2007. 12. 25.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그래서 나처럼 몇 번이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몇 번이고 망설이고 있습니다.
2018. 2. 23.
첫눈치고는 꽤 세차게 퍼붓더니 10분쯤 지나자 금세 그쳤버렸다. '눈이 잠깐 내리고 그쳤어.' '그래? 여긴 아직이야.' 나는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곧 도착할 거라고 말했고 K는 눈이 싫다고 대답했다.
좋아할 것이란 기대와는 다른 반응에 나는 살짝 놀랐다. 눈 오는 날을 싫어했던가? 내 기억 속 K는 분명 눈 오는 날을 좋아했다. 당연하듯 그렇게 여겼던 까닭은 바로 그 '대화명' 때문이었다.
그해 11월이 꽤 추웠지만, 누구도 첫눈을 상상하진 못했다. 예상치 못한 첫눈을 맞은 건 여럿이 함께 놀러 간 여행지의 새벽이었다. 밤새워 놀 수 있을 것 같은 기세가 한풀 꺾인 건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모두 밖으로 뛰쳐나가 첫눈을 반겼다.
그 뒤로 며칠간 K의 대화명은 "스무 살 첫눈을 함께 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부러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누군데?' 스치듯 던진 질문에, K는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으로 "너잖아."라고 대답해주었다.
내 기억에 K는 눈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첫눈 오는 날을 좋아했을 것이다. 혹시나 그것마저 아니더라도 K는 스무 살 첫눈을 좋아했다. 그 기억은 틀림없다.
2013. 11. 17.
어렸을 적 우리가 그렸던 '꿈' 같은 것들이 이제는 정말 '꿈' 같은 것으로 하나둘씩 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 K는 말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긴 해. 우리에겐 '동네 카페'가 없었어."
"외국에 하나 정해놓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등대를 떠올렸던 건 아마 그즈음에 봤던 어떤 영화의 장면이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그 카페라든지, 그 벤치라든지 아니면 그 다리라든지." 내가 예상한 등대는 아니었지만 어떤 그림이 떠올랐고 나는 "그럼 거기서 만날까." 되물었다.
K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내가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드네."라며 말을 흐렸다. K는 길치였고 아마 지금도 길치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너무 엇갈린다며, 그래서 드라마를 잘 안 본다고 말하더니 우리는 너무 엇갈리지 말자고, 슬픈 장면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헤매고 엇갈려 늦더라도 기다려주기로 했고, K는 도착하면 안아주기로 약속했다.
2013. 9. 2.
어떤 순간이 있다. 가을이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처럼 반듯하게 선으로 그을 수는 없어도, 누구나 그것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그날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 속의 인물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본 것 같다."라는 독백을 할 때, 나는 문득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603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문 새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모르고 있었는데 가을이 시작됐었구나, 처음으로 가을을 알아차렸다. 실은 시작된 것이 아마도 가을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12. 9. 27.
세상에 '휘요하다'의 말뜻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가운데 '휘요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M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서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M은 내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쓰기도 힘든 한자어를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적어보고는 "그건 '밝게 빛나다'라는 뜻이야."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구름이 걷히자 호수 위에 달이 휘요하게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쓰는 거야."라며 단어의 용법도 가르쳐 주었다.
무엇을 알게 되는 것과 좋아하게 되는 것 사이에 어떤 마법이 작용하는지 알아챌 수는 없겠지만, 종종 그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렇게 나는 '휘요하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그 순간 M이 그랬던 것처럼 그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2017. 4. 11.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을 때 마침내 이 권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나는 권태로 인한 무기력감 때문인지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도 아직 학교에 남아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H였다. 이제 방학이 시작되어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가을학기가 개강할 때나 올라올 것 같다며 가기 전에 잠깐 얼굴이나 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 그 벤치에 앉아있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지어 '그 벤치'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학교 앞 버거킹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잠깐 '그 벤치'를 생각했지만 내 예상이 틀림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윽고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고 나는 발길을 마로니에공원으로 향했다. 무대 앞 돌벤치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H는 그곳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원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H에게 전화가 왔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이며 내가 엉뚱한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전화를 받아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잰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교차로 근처 벤치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주로 들어주는 입장이었지만, 늦은 밤 길가에서 나는 소음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집중해서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누구누구 씨 큰딸이라는 말만 하면 동네에서 다 알 정도로 활발했다는 것과 마당에서 반겨주는 개들이 보고 싶다는 것, 동생이 스무 살이 되면 서울로 와서 같이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중간에 길을 헤맨 것을 들키지 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원남동 사거리 앞에 도착했을 때, H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묻지 않은 채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엔 그런 일이 자주 생겼다. 시간이, 장소가, 때로는 마음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긋나는 일이 잦았다. 내가 느꼈던 무기력감은 권태나 그런 것들이 아닌, 아마 그런 종류의 사소한 어긋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5. 7. 25.